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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준형 신탁의 ‘저주'

은행계 부동산 신탁사 부실 현실화..자금 수혈 '안간힘'

2024-09-27 08:11:48이현중hj.lee@corebeat.co.kr

부동산 경기가 침체로 들어서며 불확실성이 커진 2022년 이후 부동산 신탁회사의 신탁계정대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신탁계정대는 개발 사업장의 공사 대금이 부족할 경우 신탁회사가 먼저 자금을 투입하고 나중에 회수하는 대여금으로, 신탁회사의 부동산 금융 위험을 가늠하는 잣대다.  


한국신용평가(한신평)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주요 8개 신탁사의 신탁계정대는 2021년말 1조5457억원에서 2023년  6월말 4조원으로 급증했다. 이 가운데 차입형 신탁계정대는 1조 5143억 원에서 3조 3182억원으로 늘었고, 책준형 신탁계정대는 313억원에서 6864억원으로 뛰어 22배나 급증했다. 규모 면에서는 차입형이 훨씬 크지만 책준형의 증가폭이 가파르다. 



신탁사의 개발신탁 수주는 대부분 차입형이 주를 이뤘으나 2019년부터 책준형 수주도 늘면서, 정점에 이르렀던 2021년에는 오히려 그 규모가 차입형보다 컸다. 주요 8개사를 포함한 전체 13개 신탁사의 신규 수주 규모는 2021년 말 9890억 원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이다. 올해 6월 말 기준으로는 2000억 원 규모로 축소됐으며, 특히 이 가운데 책준형은 더욱 급격히 줄었다. 


신규 수주는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신탁계정대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 금융기관의 개발사업에 대한 대출은 투입시점과 규모가 대부분 확정되어 있는 데 반해, 신탁사의 개발사업은 사업자금이 필요할 때 자금이 투입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투입시점이나 규모가 미정이기 때문이라고 한신평은 분석했다. 결국 수주 했던 사업장의 부실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한신평은 책준 사업장의 낮은 분양률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8개 회사의 신탁계정대가 내년 6월에는 4조 7146억 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대손충당금은 1조 1000억 원에서 1년후  1조 2801억원이 될 것으로 추정됐다. 

은행 계열 신탁사 책준형에 몰입

차입형은 신탁사의 신탁계정으로 차입을 일으켜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신탁사가 사업의 시행 및 분양 등 모든 것을 신탁사 명의로 진행하고, 사업이 마무리되면 시행 이익도 일부 갖는다. 이에 반해 책준형은 신탁사가 일정 기한 내 준공을 보장하는 상품으로 시공사가 부도 등의 이유로 준공을 하지 못하면 신탁사가 책임지고 준공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 부담도 크다. 


신탁사별로 차입형과 책준형의 비율이 각기 다르다. 한국토지신탁, 한국자산신탁 등 일반 기업계 신탁사는 차입형 75%, 책준형 25%로 차입형 비중이 훨씬 높다. 전통적으로 개발 사업의 경험이 풍부해 보수가 높은 차입형 사업을 주로 해왔다. KB, 신한, 하나, 우리 등 은행계열 신탁사는 차입형 36%, 책준형 64%로 책준형이 2배 수준이다. 책준형은 규모가 작고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 시공사를 대상으로 신탁사가 신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탁사 입장에서는 대출과 비슷해 규모를 늘려온 것이다.


신탁계정대 최대 규모는 'KB부동산신탁'

은행계 신탁사 가운데 신탁계정대가 가장 많은 곳은 KB부동산신탁이다. 지난 3월말 기준 7866 억 원에 달한다.  2020년(906억원)보다 8배 넘게 급증, 다른 은행계 신탁사보다도 증가폭이 월등히 크다.이 때문에 한신평은 지난 2월 KB부동산신탁의 단기 신용등급을 기존 ‘A2+’에서 ‘A2’로 하향 조정했다. 책준형 관련 우발채무 위험이 현실화되면서 대손충당 관련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신탁계정대가 늘어나고 있어 신용등급에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신탁계정대가 많은 곳은 하나자산신탁이다. 3월말 기준 3122억 원에 달한다. 역시 지난 2020년(952억원)에서 3.3배나 늘었다. 신한자산신탁과 우리자산신탁의 신탁계정대는 3월 말 3111억원, 1174억원에 달했다. 


신탁계정대가 늘어나는 것은 이들 은행계 신탁사의 책준형 부분에서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계 신탁사들은 모회사인 지주사나 은행의 유상증자나 자체적인 외부 차입 등으로 유동성 확보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가장 바빠진 곳은 KB부동산신탁이다. 지난 2월 단기 차입금 한도를 3400억 원으로 확대한 데 이어 6월에는 설립 후 처음으로 1700억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이 가운데 1500억 원 정도를 KB금융지주가 인수했다. 최근에는 KB금융지주를 대상으로 유상증자도 결의했다. 총 1500억 원 규모로 납입일은 27일이다. 


신한자산신탁도 모회사의 자금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신한금융지주로부터 1000억 원을 차입한 데 이어 5월에는 1000억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전액 신한금융지주가 인수했다. 사실상 모회사로부터 2000억 원을 지원 받은 셈이다. 6월 말에는 이사회를 통해 단기 차입금 한도를 1000억 원에서 4000억 원까지 확대했다. 금융기관 차입 1500억 원과 기업어음(CP) 1500억 원 등 3000억 원 늘렸다.


우리자산신탁은 지난 3월 우리금융지주의 도움을 받아 21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진행했고, 하나자산신탁은 지난 7월 1000억 원 규모의 금융기관 차입한도를 새로 만들었다. 아직 유상증자를 하지는 않았지만 선제적인 차원에서 유동성을 확보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NICE신용평가 관계자는 “은행 계열 신탁사의 자금 소요는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상황 악화를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은행 계열 신탁계정대가 3000억~8000억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